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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기초과학자 5인, 그들이 바꾼 현재

[과학의 날 특집]
‘위대한 과학자’들이 알려주는 기초과학이 나아가야 할 길

‘과학데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과학데이’ 포스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

1935년 제2회를 맞은 ‘과학데이’ 포스터에는 과학기술이 가져다 줄 밝은 미래에 대한 당대의 기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1934년 4월 19일, 민족 산업의 독립적 발전을 위해 설립된 발명학회의 임원들은 찰스 다윈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며 제1회 과학데이를 지정했다.

이후 1968년, 과학기술처 출범일인 4월 21일로 지정된 ‘과학의 날’에는 1930년대 과학데이의 정신을 이어받아 대중을 위한 다양한 과학 행사를 개최하는 한편, 2015년부터는 과학기술진흥에 힘써온 과학기술유공자들을 지정하여 표창하여 왔다.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해 공헌한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적 예우와 지원을 통해 과학기술인의 명예와 긍지를 높이는 동시에 국민과 청소년들에게 존경받는 과학기술인 상을 제시하는 것이 과학기술유공자제도의 목적이다. 국내 유일의 기초과학 전담 연구기관인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설립(2011년) 역시 과거 황무지와 같았던 기초과학 연구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온 과학자들이 노력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4월 21일은 제53회 과학의 날이다. 과학의 날을 기념하며 오늘날 과학연구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한국 기초과학의 토대를 만든 5인의 업적과 오늘날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의 업적은 과학적 성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파급력과 후속 세대에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측면에서 더욱 부각된다.

유경로 교수(1919-1997)
현대천문학과 지구과학 교육 기틀 마련

유경로 교수 (출처: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 유경로 교수 (출처: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공부하는 사람은 돈 욕심을 버려야 한다. 돈을 알면 공부를 못해.”

‘지구과학’이란 교과목은 언제부터 배우기 시작한 걸까. 적어도 국내에서는 그 시작점에 故 유경로 서울대 교수가 있다. 유 교수는 천문학과 지구과학교육, 그리고 과학사 세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과학자다.

그는 1955년 서울대에서 국내 최초 천문학 강의를 개설했다. 이어 1959년에는 서울대 사범대에 지학과(지구과학교육과)를 창설하는 등 천문학과 지구과학교육 두 방면에서 업적이 두드러진다. 13편의 천문학 논문을 출판했을 뿐 아니라 한국지구과학교육회를 창설하여 초중등 과학교육과정 개발에도 참여하며 지구과학이 중등과학교육의 필수 교과목으로 자리잡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학자로서는 한국 전통천문학의 우수성을 증명한 성과를 올렸다. 당시 한국의 천문학사 연구는 불모지와 다름 없었다. 유 교수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온 제자들과 함께 조선의 천문과 역법을 체계화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의 역주를 편찬함으로써 한국 천문학사 연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당시에만 해도 그 내용이 현대 천문학적으로 어떻게 해석되는지 연구된 적이 없었다. 천문학자들은 유 교수의 업적을 한국 천문학사 연구에 있어 최대의 업적으로 꼽는다. 퇴임 후 그는 소남천문학사연구소 설립 및 한국과학사학회 회장 역임 등의 활동을 통해 한국과학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故유경로 교수는 제자들과 함께 ‘칠정산내편(왼쪽)’과 ‘칠정산외편’의 역주를 편찬하며 한국천문학사에 기념비적 성과를 남겼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故유경로 교수는 제자들과 함께 ‘칠정산내편(왼쪽)’과 ‘칠정산외편’의 역주를 편찬하며 한국천문학사에 기념비적 성과를 남겼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참 선비의 자세로 학문의 길만 우직하게 걸었던 유경로 교수는 과학, 교육학, 역사학이라는 전혀 다른 세 학문에서 개척자의 역할을 해낸 융합형 인재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업적은 학문적 성취를 넘어 후속 세대 교육을 향한 열정에서 더욱 돋보인다.

허문회 교수 (1927-2010)
쌀의 자급을 가능하게 한 육종학자

허문회 교수 (출처: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 허문회 교수 (출처: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한국의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

흰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쌀이 늘 부족했다. 당시 벼 품종들이 생산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故 허문회 서울대 명예교수‘통일벼’의 개발로 국민을 오랜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세계적인 식물육종학자다.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였던 그는 1964년 필리핀에 위치한 ‘국제미작연구소(IRRI)’에 벼 품종 개량 분야 학자로 초청받으며 본격적으로 벼 육종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냉온에 잘 견디는 ‘인디카종(열대형 벼)’와 쌀알이 짧고 차진 ‘자포니카종(한국에서 재배)’을 교배한 뒤, 그것을 다시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여 안정된 품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실험을 계속했다.

당시 육종가들 사이에서는 자포니카와 인디카를 교배하면 불임이 된다는 것이 일종의 상식이었으나, 허 교수는 수백 가지 다양한 조합을 시험하며 새로운 품종의 개발을 이끌어냈다. 1966년 허 교수는 자신이 만든 볍씨를 가지고 귀국했고, 4년만인 1970년 말부터 ‘통일벼’라는 이름을 달고 전국 농가에 보급됐다. 통일벼는 키가 작고 이삭이 크며, 잎이 곧게 뻗어 태양빛을 이용하는 효율이 높아 기존의 자포니카에 비해 평균 30% 이상 생산성이 뛰어났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통일벼”의 보급 5년 만인 1975년에는 처음으로 쌀 자급 100%를 달성하며 국내 식량 혁명을 일으켰다. ‘기적의 볍씨’라 불린 통일벼는 우리나라 50원짜리 동전 뒷면에도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다.

국제미작연구소의 온실에서 연구를 진행 중인 故 허문회 교수의 모습. 그가 개발한 통일벼는 우리나라 오십원 동전 뒷면에 새겨져 있다. (출처: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 국제미작연구소의 온실에서 연구를 진행 중인 故 허문회 교수의 모습. 그가 개발한 통일벼는 우리나라 오십원 동전 뒷면에 새겨져 있다. (출처: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이후에도 그는 우리나라 및 동북아 벼 재배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벼의 전파경로 연구에도 매진했다. 뿐만 아니라 병해충 저항성과 추위에 강한 벼 육종 연구, 간척지와 같은 염분이 높은 흙에서도 잘 자라는 벼 연구 등 허 교수의 연구는 국민의 삶, 그리고 사회의 필요와 늘 맞닿아 있었다.

이태규 교수(1902-1992)
한국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 교수 (출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 이태규 교수 (출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학문에는 민족이 따로 없다.”

학문에 대한 호기심조차 사치였던 시절, 탁월한 인물의 등장은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 故 이태규 KAIST 명예교수한국 최초의 화학자이자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과학자다.

그는 1931년 조선인이라는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을 딛고 일본 교토제국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1937년에는 식민지 출신의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업적을 토대로 교토제국대의 조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대로 떠난 이 교수는 양자화학의 거장 헨리 아이링 교수와 함께 연께 촉매, 점성이론 등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들이 1940년 발표한 ‘쌍극자 능률계산’에 관한 논문은 화학 분야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최초의 연구로 평가받는다.

해방 직후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을 맡아 일본에서 가르쳤던 후배들을 불러들였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로 교수진을 정비하여 서울대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또, 조선화학회(오늘날 대한화학회)를 설립했다. 대한화학회는 우리나라 과학계에서 가장 먼저 창립된 학회로 기록된다.

이 교수는 서울대 설립안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다시 해외로 떠난 뒤에도 꾸준히 세계적인 업적들을 냈다. 1955년 아이링 교수와 함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공식을 제시한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6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후보 추천위원으로 발탁되며 한국 화학자의 위상을 높였다.

2016년 한국을 빛낸 명예로운 과학기술인을 소재로 발행한 ‘한국의 과학’ 기념우표에는 장영실, 허준과 함께 이태규 교수가 소개됐다. (출처: 우정사업본부)
▲ 2016년 한국을 빛낸 명예로운 과학기술인을 소재로 발행한 ‘한국의 과학’ 기념우표에는 장영실, 허준과 함께 이태규 교수가 소개됐다. (출처: 우정사업본부)

1973년, 70이 넘은 나이에 그는 해외 과학두뇌 유치 대상자로 선정되며 한국과학원(現 한국과학기술원, KAIST) 석좌교수로 초빙되며 고국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50년의 긴 세월을 해외에서 보낸 그는 한국 연구 환경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여생을 바쳤다. 한국 화학 분야가 타 과학 분야보다 앞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기여가 있었다.

조순탁 교수(1925-1996)
세계 통계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쓰다

조순탁 교수(출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 조순탁 교수(출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이론 물리학을 하는 길”

故 조순탁 한양대 명예교수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후배들에게 남겼던 글의 제목이다. 조 교수는 국내 1호 이론물리학자이자 한국 물리학의 씨앗을 뿌린 개척자로 꼽힌다. 이 글의 제목에서부터 엿볼 수 있듯, 조 교수는 많은 후배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 훌륭한 선배이기도 하다.

조 교수는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55년 미국 미시건대로 유학을 간다. 이곳에서 만난 지도교수는 세계 통계 물리학계의 거장인 조지 울렌벡 교수였다. 조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고밀도 기체의 운동학적 이론’이다. ‘조-울렌벡 이론’으로 알려진 이 연구는 이상 기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볼츠만 방정식을 발전시켜 밀도가 작지 않은 계에서도 작용할 수 있도록 일반화시킨 이론이다. 이후 교과서에도 실리며 통계역학 분야에서 수없이 인용됐다. 통계 분야 난제로 꼽혔던 이 문제를 33세의 나이에 풀어낸 것이다. 이 성과로 인해 조 교수의 연구는 미국 물리학 발전 계보에 이름을 올릴 만큼 뛰어난 업적이었다.

이론 물리학자인 그는 실험물리의 중요성을 항상 주장하기도 했다. 귀국한 후에는 국내 최초 1.5MeV(메가일렉트론볼트) 사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 건설을 추진하며 이론과 실험의 조화를 강조했다. 1970년 조 교수는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자신의 연구실에서 시작한 ‘통계물리학 수요세미나’를 바탕으로 1973년에는 한국물리학회에 열 및 통계물리분과를 창설해 우리나라 통계물리학의 발전을 선도했다. KAIST 원장을 거쳐 정년퇴임 전까지 한양대에서 평교수로 근무하여 학문을 멈추지 않았다.

조 교수는 ‘일반물리학’, ‘양자역학’, ‘고체물리학’, ‘수리물리학’, ‘통계역학’ 등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와 대학 및 대학원 수준의 통계물리 전문서적을 저술하며 학계 발전을 이끌었다. 통계물리학과 기체분자운동론에서 조순탁 교수의 업적은 오늘날 한국 물리학계 발전의 발판이 되었다.

이임학 교수(1922-2005)
세계를 놀라게 한 천재 수학자

이임학 교수(출처: 과학기술유공자센터)
▲ 이임학 교수(출처: 과학기술유공자센터)

“UBC(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는 이임학이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천재 수학자가 있다. 바로 故 이임학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명예교수다. 이임학 교수는 경성제대 재학시절에도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 ‘수학천재’로 이름을 알렸다. 해방 이후 경성대에 수학과가 개설될 때 당시 수학자들의 투표를 통해 교수로 선발됐다. 그의 나이 24세의 일이다.

이후 그는 서울대 교수로 임용돼 1953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교육활동을 펼쳤다. 이때 ‘미분학’, ‘적분학’, ‘미분적분학’, ‘평면해석기하학’, ‘대수학’, ‘고등대수학’ 등 여러 권의 대학교재를 저술하며, 우리나라 수학교육의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1949년 당시 한국인 학자 최초로 해외에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군이 버린 쓰레기 더미에서 미국수학회지를 주운 그는 학회지에 실린 막스 초른 교수의 논문을 접하게 된다. 초른 교수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어렵게 않게 풀어내고 그 내용을 편지에 적어 보냈다. 초른 교수는 그 편지를 근거로 논문을 작성한 뒤 이 교수의 이름으로 미국수학회지에 투고했다.

이 교수는 캐나다에서 활동하며 군론(group theory)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1960년 발견한 새로운 종류의 단순군들의 무한한 집합을 찾아내 ‘리군(Ree group)’ 이라 명명한 성과로 세계적인 수학자 반열에 오른다. 이 업적을 토대로 1963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캐나다 과학자의 최고 영예인 캐나다 왕립학회 정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리군 이론은 수학계의 주요 연구대상 중 하나다.

세계적 석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국내에서는 최근까지 잊혀진 인물이었다. 캐나다 유학 2년 차에 국가소환명령에 불응하여 국적을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북한 방문 경력으로 오랜 기간 귀국길이 막혔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연구는 ‘한국인’이 아닌 ‘캐나다인’으로서 소개됐다.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아 비로소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으며, 이후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장’에 헌정됐다. 이 교수가 타계한 지 1년 뒤의 일이다.

과학은 시대의 산물이다.

오늘 소개한 5인의 기초과학자들은 나라가 어렵고 힘들어 학문이 사치로 여겨지던 시기에 등장해, 현재 기초과학의 터를 닦았다. 기초과학은 시대를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새로운 지식이 축적되며 과학혁명이 일어났고, 세계관이 변화했다. 그리고 기초과학을 토대로 발전한 기술은 인간, 기계,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53번째 과학의 날을 맞는 한국의 과학은 ‘제2의 도약’을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설립으로 현대적 연구 체제를 정비하고, 대학에 연구기능을 부여했다. 산업발전을 통해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 선도 국가가 되기 위해 기초과학 연구역량을 키우기 시작했다. 2011년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설립이 단적인 사례다.

IBS는 새로운 기초과학 생태계를 만든다는 점에서 과학계의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기존 지식 생태계에 존재하고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역할을 수행하며 세계적 연구성과들을 줄지어 배출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은 사회 속에 있다. 이임학 교수와 같이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로 그 평가가 유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허문회 교수의 ‘통일벼’와 같이 기초연구로 인류 행복과 사회 발전에 공헌하기 위해 기초과학에는 더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연구와 함께 오늘 소개한 ‘위대한 과학자’들 처럼 우수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100번째 과학의 날까지 한국 과학이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본 콘텐츠는 IBS 공식 블로그에 게재되며, https://blog.naver.com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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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9-12-17 1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