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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불시착'이 궁금하게 만든 북한 기초과학의 현주소

북한 과학기술에 대한 오해와 진실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던 윤세리(손예진 扮)는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인해 북한에 불시착한다. 물론, 드라마답게 이곳에서 ‘찐’ 사랑도 만난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tvN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설정이다. 드라마의 인기는 사람들 마음 속 북한에 대한 호기심도 피어 오르게 했다. ‘~씁네다’, ‘~다요’ 등 독특한 북한 말투를 흉내 내고, ‘후라이까지 말라(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겨낸 데에는 명품 조연들의 힘이 컸을 터이다. 사택마을 주부들로 이뤄진 ‘북벤져스’ 그리고 5중대 대원들의 유쾌하고 소박한 모습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북한을 꽤나 따뜻하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불과 2~3년 전에만 하더라도 북한을 사회에서 몰아내려던 분위기가 강했는데, 드라마의 주 활동 무대가 북한인 드라마가, 그것도 연애 드라마가 흥행을 하다니… 시대가 바뀌긴 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tvN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북한으로 ‘불시착’ 한 윤세리(손예진)과 리정혁(현빈)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북한의 마을, 장터 등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출처: tvN)
▲ tvN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북한으로 ‘불시착’ 한 윤세리(손예진)과 리정혁(현빈)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북한의 마을, 장터 등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출처: tvN)

4~5년 전에 필자는 작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유명 방송 작가와 북한 소재의 드라마를 함께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방송가에서는 아무리 잘 쓴 드라마라도 북한을 소재로 방영할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한참 거꾸로 돌렸던 시대의 흐름을 드라마 한 편에 의해 많이 회복한 듯 하여 나름 안심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의 불시착’을 보며 마음 한 켠 불편함이 커져만 갔다. 드라마 속 북한은 현실 속 북한의 모습을 상당히 반영하기는 했지만, 왜곡된 모습도 많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적 시각에서 그렸던 북한의 모습이 드라마 전체에 그대로 남아있어 씁쓸하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본 드라마이기 때문에 아마도 ‘북한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전형적인 제목의 북한 바로 알기 강연이 많이 파생될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전형적인 제목을 붙여 ‘북한 과학기술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평양의 랜드마크가 된 평양 과학기술전당의 모습(출처: Wikimedia Commons)
▲ 평양의 랜드마크가 된 평양 과학기술전당의 모습(출처: Wikimedia Commons)

오해 1:
북한은 이데올로기를 중시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을 홀대한다.

대대수의 사람들이 북한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주체사상,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선군, 무기 정도이다. ‘사상이 불순’하다는 비판과 함께 앞뒤 돌아보지 않고 처단하는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차갑고 합리적인 이성을 상징하는 과학기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북한은 과학기술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기에 북한의 과학기술정책은 상당히 우대받았고 우선순위로 집행되었다. 심지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던 사람도 과학기술 재능이 있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중용된 경우가 많았다.

오랫동안 지속된 과학기술 중시 정책은 오늘날 사상의 반열에 올라 ‘과학기술 중시사상’이라는 말로 불린다. 김일성은 과학기술을 전공한 ‘사람’을 직접 챙겼다면, 김정일은 ‘과학기술 자체’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80년 공식 후계자가 된 뒤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경제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여러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과학기술 수재교육을 위해 과학고, 영재고와 같은 ‘제1고등중학교’를 1984년에 설립했고, 컴퓨터를 활용하여 생산현장의 정보화, 자동화, 로보트화를 추진하자는 결정을 1988년에 채택하였다.

북한 소프트웨어 개발의 중심이었던 평양정보센터(PIC)는 1985년에 설립되었다. 이는 최첨단 무기의 대표주자인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북이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다. ICT와 정밀 자동화 기계를 제작기술을 활용한 생산자동화, 통합생산체계의 도입은 오늘날 북한 경제가 급격히 성장할 수 있는 원천이 되고 있다.

평양 미래 과학자 거리의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 평양 미래 과학자 거리의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김정은 집권기에 들어 거리, 마을, 도시 전체를 일거에 뜯어 고치거나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그 첫번째 사례가 과학기술자 전용 휴양지인 ‘연풍과학자 휴양소’였다. 평양 시내에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과 함께 거리 전체가 새롭게 바뀐 곳의 이름도 ‘미래 과학자 거리’이다. 이 속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수 전용 살림집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방문했을 때 들른 ‘대동강 수산물시장’에는 ‘과학자 식사실'이라는 이름의 특별 룸도 있다. 게다가 과학자 신분증을 내면 할인도 해준다고 한다. 북에서 과학기술은 가장 우대 받는 부문이다.

오해 2:
북한 과학기술자들은 외국에 나가지도 않고,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투고 하지도 않는다.

북한이 외국과 소통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는 미국과 UN 등에 의한 경제 봉쇄, 제재 속에 있다는 것과 우리가 북에 갈 수 없다는 것이 합쳐져서 생긴 것 같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경제가 급속히 나빠진 상태에서 북미 사이의 1차 핵분쟁까지 겪으면서 북의 외교 관계는 상당히 많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외교단절 상황은 거의 극복되어 국교를 맺은 나라의 수는 2019년 말 기준, 161개까지 회복되었다. (대한민국: 191개)

외교 관계는 없지만 여행은 허가하고 있는 나라도 있으므로 북을 여행할 수 있는 나라 수는 더 많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북에 여행할 수 없는 나라는 딱 2곳뿐이라고 한다. 대한민국과 미국. 그런데 이 두 나라 사람들이 북으로 여행을 갈 수 없는 이유는 북에서 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미국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여행만을 위한 사람이라면 비자가 아니라 ‘관광증’을 받아 누구든 방북할 수 있다. 심지어 외국인 전용 핸드폰 유심을 사면 국제 인터넷망 접속도 가능하다. 카톡, 페이스북 같은 SNS도 차단되지 않고 사용이 가능하다. 북한은 예상보다 개방된 곳이다.

김일성 종합대학 전경 (출처: 나무위키)
▲ 김일성 종합대학 전경 (출처: 나무위키)

사회주의 국가들이 건재했던 1980년대까지 북은 해외 유학생 파견부터 학자들의 교류가 나름 활발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으로 유학과 방문 등이 가장 활발했다. 물론 러시아를 비롯, 호주, 스웨덴, 터키, 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들에 소규모로 유학과 파견 등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놀랍게도 미국에서도 트럼프 정부 이전까지 북한의 학자와 관료들을 초청해 교육과 참관 등을 꾸준히 도와주었다. 2020년 1월에는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 십여명이 3주간 계절학기 수강을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교류의 폭과 형태가 바뀔 조짐으로 보인다.

북한 학자들이 해외 학술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 학자들의 평가 기준에 해외논문 투고 실적이 없었기에 특별한 경우에만 논문을 투고했다. 2004년부터 2014년까지 대략 100여 건의 논문이 국제 학술저널에서 검색된다. 대략 한 해에 10여편 정도였다. 하지만 2015년에 들어서면서 한 해 60여건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갑자기 해외 학술 교류가 활발해진 것이라기 보다 북의 정책이 바뀐 것이라 볼 수 있다. 논문 형태도 공동연구에서 단독연구로 많이 바뀌었다.

남북 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에 순풍이 불었던 2018년, 한국인터넷정보학회가 발행하는 영문 저널 Transactions on Internet and Information System(TIIS) 8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깜짝 놀랄 만한 논문이 게재되었다.

한국인터넷정보학회 발행 학술지에 실린 북한과학자의 논문(출처: TIIS)
▲ 한국인터넷정보학회 발행 학술지에 실린 북한과학자의 논문(출처: TIIS)

Songil Choe, Bo Li, IlNam Ri, ChangSu Paek, JuSong Rim, and SuBom Yun. 2018. Improved Hybrid Symbiotic Organism Search Task-Scheduling Algorithm for Cloud Computing. KSII Transactions on Internet and Information Systems, 12, 8, (2018), 3516-3541. DOI: 10.3837/tiis.2018.08.001.

희천공업대학 최성일과 김일성종합대학 리일남 등 북한 학자들이 직접 쓴 논문이 정식으로 실린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 학자의 논문이 남한 학술지에 실린 경우였다.

2015년부터 인도적 지원을 통한 남북 관계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북한의 새로운 행보였다. 당시부터 북한은 과학기술을 통한 교류협력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었다. 2017년 7월, ‘근로자'라는 당 내부 월간지에는 새로운 정부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협력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글이 실렸다. IT 부문과 탄소하나 부문에서 공동연구를 진행하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는데, 이에 대한 호응이 없으니 연구 논문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투고한 듯하다.

2018년 말부터 비록 국내는 아니지만 국제 컨퍼런스에서 남북 과학자들이 함께 만나 토론한 경우가 가끔 있었다. 2018년 말에는 중국에서 남북 산림과학자들이 함께 토론하였고 2019년 영국 밀턴케인즈에서 기초과학연구원(IBS)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영국 왕립학회가 공동 개최한 ‘제4회 한·영 리서치 콘퍼런스’에서 남북 과학자들이 만났다. 컨퍼런스에 참가한 북한 지진청 김혁은 백두산 화산 및 지진에 대해 관측 결과를 소개하면서 공동 연구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드러냈다.

김정은 시대 접어들면서, 국제적 기준, 눈높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북한 과학기술 학계도 제재와 봉쇄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북한 학자들은 물론 그들의 논문을 더욱 자주 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오해 3: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응용과학보다
기초과학이 더 발달했다.
소련을 따라했던 북한도 기초과학을 더 지원했다.

소련의 과학기술계는 기초과학이 발달했다는 의견이 많다. 수익성이나 활용가능성을 염두에 많이 두는 자본주의 국가의 연구 경향에 비해, 말 그대로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의견들이 많이 생긴 듯하다.

사실 소련의 과학기술계는 기초과학을 특별히 강조했기 보다,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혹은 자연과학과 공학의 역할분담이 강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물리, 수학,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는 종합대학이나 과학원이라는 중앙 연구기관에서 담당하고 공학 분야는 해당 분야 전문 공업대학이나 정부 부처 산하 연구소에서 담당하는 구조였다.

북한도 기초과학을 더 지원했을 거라는 이미지는 북한이 소련을 모방하고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듯하다. 1940년대와 전쟁시기까지는 소련의 지원이 북한에게 절대적이었고 국가 시스템 설계하는 데 소련식을 많이 모방하긴 했다. 하지만 북한의 자주적 지향성은 건국 직후부터, 혹은 전쟁 직후부터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북한 과학기술계도 처음에는 소련 시스템을 참고하긴 했지만 곧바로 현실에 맞게 변형하기 시작하였고 1950년대 말부터는 독자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과학기술계의 핵심 기관인 ‘(국가)과학원’은 1952년 12월에 개원하자마자 소련 시스템과 달리 ‘공학연구소’를 과학원 산하 연구소로 설치하였다.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를 구분한다는 소련 시스템과 달리 연구인력과 연구시설의 부족 그리고 생산현장에 맞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요구에 맞추어 ‘과학원’ 산하에 생산현장의 요구에 맞는 연구를 수행하도록 ‘공학연구소’를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1958년에는 연구실에서 수행하던 과학연구사업과 생산현장에서 수행하던 기술지원사업을 구분하던 방식을 버리고 생산현장에서 과학연구사업과 기술지원사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현지연구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현장 중심’의 기술혁신 시스템이 자리잡기 시작하여 30%를 넘어서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지원할 수 있었다.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전통은 북한 과학기술계가 연료, 원료, 기술, 인력의 ‘자립’을 강조하는 특성을 지니게 했고 이는 1960년대 정치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된 ‘주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주체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과학기술계의 자립노선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 ‘과학기술과 경제의 일체화’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정리되었다. 생산현장과 동떨어진 연구가 아니라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과학기술 연구를 수행하라는 정책을 강조한 것이었다. 생산현장에 ‘현지연구기지’를 만들어 과학연구와 기술지원을 동시에 추진하던 것을 넘어, 연구소 안에 ‘상품 생산공장’을 만들어 연구와 생산을 동시에 진행하라는 취지였다.

평양 김책공업종합대학 전경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평양 김책공업종합대학 전경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정은 시기에 접어들어, ‘일체화’ 개념은 더 넓어져 ‘교육과 과학연구, 생산의 일체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북한식 ‘산학연’ 협동 정책이 등장한 것이다. 북한 최고의 종합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 안에 ‘첨단기술개발원’과 ‘미래과학기술원’을 만들어 첨단 연구 결과를 상품으로 직접 연결시키면서 그 과정을 통해 교육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생산현장의 정보화, 과학화, 자동화를 통해 새로운 기술혁신체계를 만들고 싶은 북한 지도부는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두 종합대학을 앞세워 모범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북한은 소련과 달리, 기초과학보다 현장 밀착형 과학기술의 발달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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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11-28 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