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에는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신비의 기계 '모티프'가 등장한다. 헤어진 연인과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 주인공은 모티프의 능력이 기대어 하나하나 기억을 지워 나간다. 하지만 곧 소중한 추억까지 지워져버려 고민에 빠진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영화처럼 우리 일상에서도 슬프거나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어떨까? 갑작스러운 충격과 공포의 순간이 기억으로 각인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일명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다면 고통의 터널에 갇힌 많은 이들에게 큰 희망이 되리라 기대된다.

우리원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신희섭 단장 연구팀이 이러한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는 심리치료법의 효과를 동물실험으로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경험적으로만 활용되던 심리치료법의 효과를 입증한 것은 세계 최초다. 이 과정에서 연구진은 공포반응을 감소시키는 새로운 뇌 신경회로도 발견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번 연구결과는 세계 최고 학술지 네이처(Nature, IF 41.577)에 2월 14일 새벽 3시에 게재되었다. 네이처는 이번 논문을 를 통해 집중 조명했다.

▲ 트라우마 기억을 가진 생쥐 모델을 이용해 양측성 자극이 동반될 경우, 공포반응이 효과적으로 감소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IBS의 이번 연구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이미지
(제공 제니곽 일러스트레이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는 심리치료 기법 중 하나인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가졌다. 공포기억을 떠올리는 동시에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반복해 공포반응을 줄이는 기법이다. 치료법에 효과는 경험적으로 입증되었으나 왜 효과가 있는지 그 과학적 원리는 밝혀진 바 없었다.

연구진은 우연히 TV에서 시각적 자극이 동반된 심리치료법을 보고 이번 연구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기존 논문에서 중앙 내측 시상핵이 공포기억 반응-감소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발표했지만, 원리를 밝힐 수 없었다. 연구진은 착안해 주위 집중과 안구 운동을 담당하는 상구와 중앙 내측 시상핵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연구를 설계했다. 먼저, 연구진은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경험하고 특정 자극으로 공포 반응을 보이는 생쥐모델을 만들었다. 전기자극과 함께 청각 자극(삐-)을 동시에 주는 상황에 노출되어 추후에는 소리만 들려도 공포 반응을 보이는 원리다.

실험결과, 신기하게도 좌우로 반복해서 움직이는 빛 자극을 받은 생쥐는 행동이 얼어붙는 공포 반응이 빠르게 감소했다.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경우에도 공포 반응은 재발하지 않았다. 더 자세한 기전을 알아보고자 연구진은 신경생리학과 광유전학 기법을 통해 실제 효과를 매개하는 회로가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 결과 공포반응 감소 효과는 시각적 자극을 받아들인 상구에서 시작해 중앙 내측 시상핵을 거쳐 공포반응을 관장하는 편도체에 도달하는 신경회로에 의해 조절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신경회로를 광유전학 기법으로 강화하자 공포반응 감소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고, 반대로 억제하자 효과는 사라졌다.

▲ IBS 연구진은 양측성 시각자극(ABS)을 이용한 공포기억 반응-감소법의 효과를 동물실험을 통해 입증하는데 성공했다(아래). 안구운동 및 주의집중을 담당하는 상구를 자극하면 공포기억을 담당하는 편도체를 억제하는 새로운 신경회로가 활성화되는데, 이 때 중앙 내측 시상핵을 거친다.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신경회로는 변화된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편도체를 억제해 공포반응의 재발을 줄이고, 더 효과적인 정신적 외상 치료를 유도한다.

이번 연구는 경험적으로만 확인되던 심리치료 기법 효과를 동물실험으로 입증함으로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법의 과학적 원리를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공포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좌우로 움직이는 빛 혹은 소리 등이 반복되면 정신적 외상이 효과적으로 치료된다는 사실은 기존에도 보고된 바 있으나 원리를 알 수 없었기에 실제 치료법 활용에선 도외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학적으로 효과가 검증된 만큼 앞으로 EMDR 기법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에 활발히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연구는 정재승 KAIST 교수와 공동으로 진행되었다. 연구를 이끈 신희섭 단장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단 한 번의 트라우마로 발생하지만 약물과 심리치료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공포기억 억제 회로를 조절하는 약물이나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에 집중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쉽게 치료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 이번 연구를 이끈 교신저자 신희섭 단장(왼쪽)과 제1저자인 백진희 연구원(오른쪽). 백진희 연구원은 "이번에 밝힌 새로운 신경회로의 특성을 더 자세하게 밝혀 실질적인 치료법 개선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공포기억 반응-감소 효과를 동물모델로 입증하는데 성공한 이번 연구는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연구진들의 노력이 컸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들의 단체사진. 왼쪽부터 신희섭 단장(공동 교신저자), 백진희 연구원(공동 제1저자), 참여저자인 윤용우 연구원, 변준원 연구원, 김민수 연구위원(뒤), 김성욱 연구위원(앞).

IBS 커뮤니케이션팀
고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