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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속 ‘작은 우주’ 들여다보는 초고속 레이저
초강력 레이저과학 연구단, 다양한 전자 궤도를 포착하다

‘비운의 천체’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80여년 전 자신의 존재를 처음 알아봐 준 나라에 대한 ‘의리’였을까. 자신의 지위가 행성에서 왜소행성으로 떨어진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소행성 ‘에리스’보다 지름이 70~80km 크다는 사실을 명왕성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보낸 탐사선 ‘뉴호라이즌스’를 통해 보란 듯 인류에게 확인시켰다.
지난 7월 14일 밤 과학자들은 물론 우주를 동경하는 많은 이들이 뉴호라이즌스호가 처음으로 공개할 명왕성의 자태를 기다렸다. 감히 인간의 시각 능력만으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원대한 태양계의 끝자락을 확인한다는 짜릿함에 잠시나마 심취하고 싶었을 게다.
보이지 않고 닿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단순히 호기심으로만 여기기엔 뭔가 아쉽다. 이 역시 어쩌면 인류의, 그리고 과학의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일지 모른다. 자존심을 건 탐사는 비단 지구 밖 커다란 세상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아주 작은 세상으로까지 뻗어가고 있다. 바로 분자 깊숙한 곳의 미시 세계다.

전자 움직임을 추적하는 상상

광주과학기술원(GIST)에 마련돼 있는 레이저 시설.
IBS 초강력 레이저과학 연구단은 이 시설에서 만든 펨토초레이저를 이용해
분자 속의 미시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상상하는 분자의 내부는 일면 태양계와 비슷하다. 중심에 태양이 있고 그 주변에서 행성들이 각자의 궤도에 따라 움직이는 태양계처럼, 분자를 이루고 있는 원자의 중심에도 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고유의 궤도를 갖고 움직인다. 단 태양계의 행성들은 정해진 ‘평면’ 궤도를 따라 이동하지만, 분자 속 전자들의 궤도는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고 모양이 ‘입체’이면서 제각각이다.
태양계와 분자 내부의 시간 스케일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다. 태양계에서 시간이라는 단위는 거의 찰나에 불과하지만, 분자 속에선 영겁의 세월이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에도 분자 속 전자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움직임을 반복하니 말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동안 전자가 갖는 에너지도 함께 쉴 새 없이 변한다.
도무지 가만히 있지 않는 전자들의 행동반경을 대략이라도 정의하자는 뜻에서 오래전 과학자들은 약속을 했다. 특정 수학식(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었을 때 전자가 가장 적은 에너지를 갖는 해가 나온다면, 그 해를 만족시키는 일정한 공간을 해당 전자의 궤도 모양으로 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의 궤도 모양은 전자들이 분자 속에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가진 상태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각 전자의 위치나 에너지 등에 따라 궤도의 모양은 다르다. 분자 내부 공간이 마치 서로 다른 형태의 구름처럼 생긴 전자 궤도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이후 과학자들은 이 약속이 자연의 이치에 정말 들어맞는지를 계속해서 검증해오고 있다.
분자 속 전자의 위치나 에너지가 바뀔 때마다 수 많은 전자가 모여 이뤄진 분자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도 달라진다. 이를 테면 두 분자가 만나 쪼개졌다 다시 결합하면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동안 각 분자 내부에선 수많은 전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반응의 성사를 좌우한다. 어떤 반응은 술술 잘 일어나지만 어떤 반응은 당최 안 일어나는 것도, 어떤 반응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빠른데 어떤 반응은 몇 날 며칠거북이 걸음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거꾸로도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분자속 전자들의 궤도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거나 아예 사전에 예측까지 할 수 있다면 화학반응을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 말이다. 하지만 분자 크기 정도를 볼 수 있는 기술은 있을지언정 안타깝게도 분자 속에 들어 있는 전자의 불규칙한 움직임까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최근까지만 해도 없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든 레이저

수직으로 편광된 2색(파장 800nm, 400nm) 레이저 펄스를 이용한 2차원 고차조화파 분광법에 의해 이산화탄소의 다중 전자 궤도에서 발생하는 고차조화파를 관측하는 개념도. 즉 최외각 오비탈과 외각 오비탈로부터 각각 발생하는 홀수(채널1)와 짝수(채널2) 차수 조화파는 분리되어 스펙트럼 상에 나타난다.

인간의 눈이 볼 수 없는 영역을 들여다보는 도구의 대명사 하면 현미경이다. 하지만 현대과학에선 이 역시 편견이다. 굳이 현미경이 없어도 된다. 분자 속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최근 과학자들은 레이저에 기대기 시작했다. 단, 미시세계를 꿰뚫는 레이저는 한밤중 열리는 행사에서 각양각색 무늬를 연출하는 일반적인 레이저와는 전혀 다르다. 2004년 캐나다 연구진은 ‘아주 작은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레이저의 특별한 능력을 포착해냈다.
특정 파장을 갖는 레이저를, 궤도를 들여다보려는 분자에 강력하게 쏘면 전기장이 만들어지면서 내부의 전자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궤도에서 튀어나오고 분자는 전하를 띠는 이온 상태가 된다. 그 뒤 전자가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레이저에게 포착돼 자신이 돌아가려는 궤도 정보를 노출시킨다. 레이저는 이 정보를 낚아챈 다음 여러 가지 주파수를 갖는 파동(조화파)으로 쪼개지는데, 이때 나타나는 조화파의 주파수는 일정한 배수로 증가하는 규칙을 보인다. 이를 고차조화파라 한다. 캐나다 연구진은 바로 이 고차조화파를 분석하면 전자 궤도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당시 캐나다 연구진이 레이저로 들여다본 분자는 질소다. 질소 분자 내 여러 전자 중에서 궤도가 가장 바깥(최외곽)에 있는 전자의 궤도를 고차조화파로 재구성해본 것이다. 과학자들 사이에선 그렇다면 이 방법으로 더 깊숙이 들어 있는 전자들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전자 궤도 정보를 담고 있는 고차조화파가 만들어지려면 일단 전자가 궤도에서 떨어져 나와야 하는데, 각 전자 궤도의 위치나 깊이에 따라 에너지처럼 이온화에 필요한 특성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상심해 있던 과학계에 최근 참신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이들은 다름 아닌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초강력 레이저과학 연구단이다. 서로 다른 색깔(파장)을 갖는 레이저를 한 번에 쏘는 ‘협공’을 시도한 것이다.

화학반응 순간 포착할 가능성 기대

연구단은 레이저를 특수 물질에 통과시켜 각기 다른 파장을 갖도록 만든 다음, 진동하는 방향이 서로 수직이 되도록 조절해(편광) 이산화탄소 분자들에 쏘았다. 캐나다 연구진이 시도한 기존 기술이 한 가지 레이저를 1차원으로 쏜 것과 달리 연구단은 두 가지 레이저를 2차원으로 가한 것이다. 수직 방향으로 편광된 각 레이저는 이산화탄소 분자들을 지날 때 분자 속 전자들이 떨어져 나왔다가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여러 개의 고차조화파로 성공적으로 분리됐다.
그런데 한 레이저는 조화파의 주파수가 짝수 배로, 이와 수직 방향으로 편광된 다른 레이저는 홀수 배로 쪼개졌다. 한 가지 레이저만 쏘았을 때보다 조화파 수가 2배로 는 것이다. 더구나 주파수가 홀수 배인 조화파와 짝수 배인 조화파는 각각 다른 전자 궤도 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홀수 배 조화파는 최외각 전자의 궤도를, 짝수 배 조화파는 이보다 한 단계 안쪽(외곽)에 있는 전자의 궤도를 보여줬다.
연구단에 따르면 고차조화파를 이용해 둘 이상의 전자 궤도를 개별적으로 관측한 건 이 실험이 처음이다. 레이저가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자 속 다중 전자 궤도들을 추적할 수 있음을 연구단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입증한 셈이다. 이 실험결과는 물리학 분야 국제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스> 4월 14일자 온라인판에 실렸다.
연구단보다 앞서 약 4년 전 <네이처>에는 1차원 고차조화파를 이용해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동안 브롬 분자가 원자로 쪼개지는 찰나를 포착할 수 있음을 증명한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화학반응 과정 중 정확히 어느 순간에 브롬이 분자에서 원자로 성질이 바뀌는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연구단의 이번 실험 덕분에 2차원 고차조화파를 이용한다면 분자가 원자로 전환되는 순간뿐 아니라 화학반응 중 발생하는 더 다양한 찰나의 특성을 관측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과학계 안팎에서 커졌다.

1000조분의 1초에서 100경분의 1초로

남창희 단장은 1990년대 중반 펨토초 레이저 연구에 뛰어들어 레이저 기술의 ‘국산화’를 이끌었다.
레이저 제작의 기본인 분광기와 공진기 같은 기기부터 직접 만들어 연구했다.

분자들의 미시 세계에서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변화를 이 같은 방식으로 포착할 수 있는 레이저는 가시 세계의 기술로는 엄두 낼 생각조차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특수한 빛, 바로 펨토초 레이저다. 연구단이 실험에 사용한 건 30펨토초 레이저. 빛이 한 번 없어졌다 생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1000조분의 30초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화학반응을 분자 단위에서 추적하려면 펨토초보다 느린 레이저는 언감생심 명함도 못 내민다.
과학계가 펨토초 레이저에 열광하던 것도 잠시. 이제 과학의 자존심은 아토초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원자 여럿이 붙어 있는 분자나 분자 여럿이 결합한 화합물 같은 덩어리 단위의 전자 궤도를 관측하는 건 펨토초 레이저로도 할 만하지만, 개별 원자나 분자에서 전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려면 더 빠른 레이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토초는 얼마나 빠른 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100경분의 1초를 의미한다.
펨토초 레이저는 이미 일부 기술이 상용화됐지만, 아토초 레이저는 연구에 활발히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구현하려면 아직 멀었다. 아토초 레이저는 펨토초 레이저를 조작해 만들어야 하는데, 사실 펨토초 레이저도 다루기가 결코 쉽지 않다. 펨토초 레이저 발생에 쓰이는 기기들은 대부분 미세한 환경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온도, 습도 등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청정실에 ‘모셔’ 놓아야 한다. 기기가 예민한 만큼 레이저 제작도 여간 까다롭지 않은 것이다. 그날그날의 기기 조건이나 레이저 상태 등에 따라 실험 성패가 크게 엇갈리기도 한다.
특히 거울은 습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표면이 손상되기 일쑤다. 펨토초 레이저 구현용 거울은 만들려는 빛의 파장에 맞게 특수 제작해야 한다. 일상생활에 쓰이는 보통 거울로는 펨토초 레이저를 만들기가 불가능해서다. 모든 빛을 반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보통 거울은 들어오는 빛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다. 그만큼 빛이 가진 에너지도 사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거울을 이용해 레이저를 만들면 실험이 부정확해질 수밖에 없다.
레이저의 까다로운 ‘비위’까지 맞춰가며 미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이유에 대해 남창희(광주과학기술원 물리·광과학과 교수) 연구단장은 “기존 과학기술로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물리 현상을 알아내고, 우주나 분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극한 현상을 실험실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1990년대 중반 펨토초 레이저 연구에 뛰어든 남 단장은 레이저 기술의 ‘국산화’를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레이저 제작의 기본인 분광기와 공진기 같은 기기부터 모두 직접 만들어 연구해왔다. “국내에서 누가 해본 경험이 없는 분야라 연구 초기 고생이 컸다”는 남 단장은 “학생들의 아이디어와 노력 덕을 많이 봤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마침 올해는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빛의 해’이기도 하다. 남 단장이 이끄는 연구단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남다른 빛’에 자존심을 걸었다. 그 빛이 지금은 아직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분자와 원자 내부를 언젠가는 훤히 들여다보게 해줄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연구단은 확신하고 있다.

글. 임소형 한국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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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11-28 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