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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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석기시대를 지탱하는 신기술

실리콘의 한계를 넘어서

제 2의 석기시대를 지탱하는 신기술 실리콘의 한계를 넘어서

반도체 산업에 가장 중요한 재료는 무엇일까? IT 산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쉽게 짐작하겠지만, 바로 모래다. 현대의 IT 소자와 집적회로들은 실리콘 기판에 에칭 기법을 적용하여 제작한다. 실리콘 기판의 재료인 규소는 지각에 산소 다음으로 풍부한 원소로 모래에서 규소 성분을 추출하여 반도체 산업용 실리콘을 만든다. 이 때문에 현대 사회를 '제 2의 석기시대'라 칭하기도 한다. 잭 킬비(Jack St. Clair Kilby)와 밥 노이스(Bob Noyce)가 집적회로를 발명한 이래, 모래를 기반으로 한 반도체 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세계를 'IT 혁명'으로 이끌었다. 만약 이들의 발명이 없었다면 수많은 트랜지스터를 덕지덕지 연결한 회로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당연히 이러한 회로들의 성능은 현재 시각으로 보았을 때 재앙 수준으로 형편없었을 것이며 가격도 엄청나게 높았을 것이다. 당연히 일상을 바꾼 IT 혁명도 늦어지고 정보화사회의 도래도 한참 미뤄졌을 것이다. 현대 사회를 농담삼아 '제 2의 석기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실리콘의 역할은 컸다.

실리콘의 한계와 MOSFET

잭클레어 킬비. 킬비 특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IT산업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재료, '실리콘'에 있었다.

▲ 잭클레어 킬비. 킬비 특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IT산업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재료, '실리콘'에 있었다.

그러나 실리콘의 한계가 슬슬 드러나고 있다. 1965년, 미국의 잡지 일렉트로닉스 매거진에는 노이스의 절친한 동료이자 인텔의 공동창업자인 고든 무어(Gorden Moore)의 이름을 딴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언급됐다. 당시의 경험에 바탕을 두어 반도체의 집적도가 매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고 예측한 것이다. 이 법칙은 한동안 제법 잘 지켜졌지만 집적도가 높아지고 공정도 미세해지자 실리콘 반도체는 성능의 한계에 부딪혔고 무어의 법칙은 깨지고 말았다. 현재 인텔 등의 반도체 기업들은 집적도를 높여 속도를 끌어올리기보다 병렬처리기술을 향상시켜서 복수개의 코어를 이용함으로써 속도 향상을 꾀하고 있다.

노이스가 고안한 집적회로는 '쌍극접합 트랜지스터'가 기반이었다. 전극 두 개와 이미터를 지닌 트랜지스터를 실리콘 기판 위에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로는 제조 공정이 복잡할 뿐 아니라 인접한 트랜지스터를 격리하기 위해 제법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본격적으로 복잡한 회로가 나타나면서 쌍극접합 트랜지스터는 금속-산화물-반도체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metal-oxide- semiconductor field effect transistor, 이하 MOSFET)로 대체됐다.

테스트 패턴에 있는 두 개의 모스펫의 현미경사진. 두 개의 게이트와 세 개의 소스/드레인 절을 위한 프로브패드는 라벨이 있다. ⓒ위키미디어

▲ 테스트 패턴에 있는 두 개의 모스펫의 현미경사진. 두 개의 게이트와 세 개의 소스/드레인 절을 위한 프로브패드는 라벨이 있다. ⓒ위키미디어

MOSFET은 1926년, 줄리어스 릴리언필드(Julius Edgar Lilienfeld)가 특허출원한 기술로 반도체 표면에서 동작이 일어나게 한 트랜지스터다. 표면에 반도체 구조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노광-식각으로 진행되는 집적회로 제작기술에 적용하기에는 최적의 기술이었다. 문제는 표면에서 작동하다보니 미세한 불순물이 들러붙기만 해도 정상적인 작동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노이스와 무어가 창업한 인텔은 생산라인에 방진장치를 도입함으로써 불순물을 대폭 줄이고 10%에 불과하던 수율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본격적인 상용화에 성공한다.

MOSFET을 기반으로 한 집적회로는 반도체 기판에 '홈'을 파서 전자가 이동하는 통로를 만든다. 말하자면 전자가 이동하는 전선이 되는 셈이다.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단위 면적에 집약되는 트랜지스터의 수도 많아지고 이에 필요한 전자의 통로, 회로선의 밀도도 높아진다. 회로선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인접한 회로선과 거리도 줄어드는데, 40nm 미만의 거리에서는 정확한 동작을 보장하기 어려워진다. 이전까지는 홈 속에 얌전히 잘 자리잡고 있던 전자들이 회로선의 간격이 일정 거리 미만으로 줄어들면 '양자 터널링' 효과에 의해 인접한 회로선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근 생산라인에 투입되는 2, 30nm대 공정에서는 전자들의 터널링 효과를 막기 위해 홈 사이에 나노소자 절연체를 삽입하고 있다. 2020년대 중후반에 실용화될 것으로 보이는 10nm대 공정에서는 절연체 삽입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실리콘 기판의 홈을 덮어서 o자형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실리콘을 넘어서

문제는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부도체 삽입이나 o자형 홈을 만드는 일이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현재도 o자형 홈을 만드는 기술은 곡예에 가까운 고난이도 기술이라고 한다. 실리콘 소재 자체의 한계도 있다. 반도체 공정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단결정 실리콘은 충격에 약하고 공정 자체에 고온처리가 필요하여 유연성을 요하는 제품에는 적용하기 어렵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가 진행중이다. 가장 부각되는 분야는 바로 소재. 기존의 알루미늄 배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알루미늄 대신 전기전도성이 높은 구리를 적용하여 미세화에 따른 저항을 낮추는 한편, 기판을 이루는 실리콘을 대체하는 물질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대표적인 소재가 갈륨-비소(GaAs) 화합물로 대표되는 III-V족 화합물이다. GaAs 반도체는 단결정 실리콘 반도체에 비해 전자이동속도가 높아 초고속 집적회로에 사용된다.

최근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고분자 반도체도 기대주다. 고분자 반도체는 탄소를 기반으로 하여 공정을 단순화할 수 있고 높은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어 활용폭이 넓지만 아직 실용화 초기 단계라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2011년에 노벨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된 그래핀도 탄소 기반 소자로 탄소나노튜브나 풀러렌 기반의 반도체 소자도 활발하게 연구중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도 스핀트로닉스를 연구중이다. 그림은 저차원 전자계 연구단(단장 염한웅)이 최근 발표하여 <네이처>에 수록된 스핀 분극 방법에 대한 논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연구에 활용한 탈륨/실리콘(111)의 원자 구조를 위에서 본 모습이다.

▲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도 스핀트로닉스를 연구중이다. 그림은 저차원 전자계 연구단(단장 염한웅)이 최근 발표하여 <네이처>에 수록된 스핀 분극 방법에 대한 논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연구에 활용한 탈륨/실리콘(111)의 원자 구조를 위에서 본 모습이다. 빨간색과 초록색은 각각 탈륨과 실리콘 원자를 나타낸다. 파란색 화살표는 원자 구조의 대칭성을 보여주는 거울 면이다. 스핀트로닉스는 새로운 '방법'이므로 상업성을 높일 수 있도록 기존의 실리콘 기판에 적용하는 연구도 활발하다.

다른 방식의 접근법도 있다. 전자의 흐름으로 정보를 표현하는 현재의 실리콘 기반 반도체는 양자터널링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다. 실제로 공정이 양자적 수준으로 미세해짐에 따라 반도체의 발전 속도도 이전보다는 다소 완만해졌다.

더 큰 문제는 실리콘 결정의 격자 크기인 약 0.54nm 이하의 미세공정은 아예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반도체공학이 현재의 발전속도를 유지한다면 대략 20년 이내에 이 정도 수준의 미세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그렇다면 길어봐야 20년이면 더 이상의 빠른 처리속도를 지닌 반도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대안 중 최근 관심을 받는 분야가 '스핀트로닉스'다. 이름 그대로 '회전'을 다루는 공학으로, 전자의 회전이 이 분야의 핵심이다. 현재 전기를 사용하는 거의 모든 일상용품들은 전자의 성질 중 전하를 이용한다. 그러나 전자는 전하 외에도 소립자로서 '스핀'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스핀은 회전하는 입자가 갖는 각운동량에 의해 나타나는 물리량으로 1/2, 또는 –1/2라는 불연속적인 두 가지 값만 존재한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성공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스핀은 디지털 신호를 표현하고 처리하는 데 최적의 물리량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전자공학이 스핀의 특징을 이용하지 않았던 까닭은 전자기 이론이 확고하게 체계가 잡혀 예측과 제어가 용이한 데 비해 전자의 스핀을 정확하게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노 수준의 다층박막, 초전도체와 강자성체 등 스핀 제어에 필요한 기술들이 고도화되면서 스핀트로닉스도 실용화가 가능한 단계까지 발전했다. 현재 사용중인 고밀도 하드디스크도 스핀트로닉스가 적용된 제품이다. 스핀트로닉스를 응용한 논리 트랜지스터는 전하를 이용한 방법과 달리 나노 단위의 크기에서도 신뢰성 높은 작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현재보다 집적도가 훨씬 높은 회로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실리콘 집적회로의 역사는 벌써 65년을 맞았다. 사람으로 치면 한참 사회적으로 활동할 시간을 지나 과거를 반추하며 노후를 즐기는 단계에 온 셈이다. 기존의 반도체 기술 역시 실리콘과 MOSFET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 변화의 핵심이 새로운 소재가 될지, 새로운 공정이 될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구조가 될지, 아니면 이 모두일지는 미지수지만 인류가 두 번째로 맞은 '석기시대'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