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그래핀의 변신

엠보싱 그래핀·주름, 그래핀·그래핀 조각···
변신은 무죄!

영화 트랜스포머의 주연 로봇인 범블비. (출처: 파라마운트)
▲ 영화 트랜스포머의 주연 로봇인 범블비. (출처: 파라마운트)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는 시시각각 자동차가 로봇으로, 또 로봇이 자동차로 변신한다. 갑자기 어디서 새로운 물질이 나타나서가 아니라 그 안의 부품들을 시시각각 재배열하며 변신을 거듭한다. 트랜스포머의 주인공(?) 로봇인 범블비는 심지어 주유구를 열고 소변도 눈다. 하지만 범블비는 죄가 없다. 말은 하지 못해도 귀여운 그 모습은 여전하지 않은가.

공상과학영화는 시간이 흘러 현실이 되곤 한다. 물질 속 원자들을 그때그때 마음대로 배열해 원하는 물질을 만들겠다는 과학자들의 상상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최근 이렇게 또 저렇게 모습을 바꿔가며 논문 속에 등장하는 그래핀의 모습을 보면 말이다. 그래핀의 변신 역시 무죄다. '꿈의 신소재'라는 별명을 가진 그래핀의 우수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들이 모여 이룬 2차원 평면 구조다. 육각형 꼭지점에 탄소 원자가 위치해 있어 ‘벌집구조’ 또는 ‘벌집격자’로도 불린다. (출처: 위키백과)
▲ 그래핀은 탄소 원자들이 모여 이룬 2차원 평면 구조다. 육각형 꼭지점에 탄소 원자가 위치해 있어 ‘벌집구조’ 또는 ‘벌집격자’로도 불린다.
(출처: 위키백과)

2004년 발견된 후 그래핀은 무한 변신을 거듭해왔다. 그래핀은 두께가 0.35nm(나노미터·1nm는 10억 분의 1m)인 소재인데, 그 두께는 원자 한 층에 해당한다. 원자 하나의 두께가 머리카락의 수십만 분의 1 정도인데, 이러한 완벽한 2차원 구조를 과학자들이 만들어냈다.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실로 놀라운 일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래핀의 원자 배열이나 나노구조를 조금만 바꾸어 주어도 그 물질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아주 많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지난 15년간 과학자들은 그래핀의 구조를 미세하게 변형시켜가며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성질과 응용가능성을 발견했다.



김영만 아저씨도 놀란 '그래핀 접기'

종이접기의 달인인 김영만 아저씨도 그래핀 접기가 이토록 대단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 화면 캡처)
▲ 종이접기의 달인인 김영만 아저씨도 그래핀 접기가 이토록 대단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 화면 캡처)

종이는 접으면 접을수록 두꺼워지고 강해진다. 2002년 미국의 한 고등학생은 1,200m 길이의 종이를 12번 접는데 성공해 유명세를 탔다. 수학자들이 이 길이 종이는 최대 7.5번 접을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 예상한 횟수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머리카락보다도 수십만 배나 얇은 이 그래핀은 몇 번까지 접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접을 수 있기나 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겠다. IBS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 연구진은 그래핀을 12번 접는 데 성공했다. 그래핀에 400nm 두께의 폴리카보네이트 필름을 코팅한 후 이를 12번 접었는데, 접은 뒤엔 두께가 3㎜인 물질이 됐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래핀과 폴리카보네이트로 이뤄진 이 복합물질을 접었더니 기계적 강도가 매우 높은 물질로 변해있었다는 것이다. 2번 접은 복합체 구조에서 그래핀이 차지하는 부피는 0.085%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접힌 그래핀으로 인해 기계적 강도의 척도인 영계수, 강도, 인성계수가 모두 50% 이상 급격하게 향상됐다.

이 연구를 함께 진행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이탈리아 토랜토대 연구진은 단순히 그래핀을 1,024겹 겹쳐놓은 것보다, 그래핀을 접어서 만든 1,024층의 복합물질이 굽히기 더 어렵다는 것도 이론적으로 규명했다. 연구진은 접힌 구조물은 층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어 구부리는 힘을 더 잘 버티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낱개의 A4 용지 한 묶음을 구부리는 것보다 같은 양의 A4 용지를 제본해놓은 책을 구부리는 것이 더 힘든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래핀과 폴리카보네이트를 붙여 12번 접은 그래핀 복합체의 모습. (출처: IBS)
▲ 그래핀과 폴리카보네이트를 붙여 12번 접은 그래핀 복합체의 모습. (출처: IBS)

멀어진 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건 새로운 엠보싱 그래핀

어떤 물질의 성질은 그 물질을 이루는 화학원소가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같은 물질이라도 구성하는 원자들 사이의 거리만 바꿔도 기존과 다른 새로운 성질이 생긴다는 연구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 연구진은 이에 착안해 그래핀을 구성하는 탄소 원자들 사이에 변화를 주는 실험을 진행했다. 기판 위에 놓인 평평한 그래핀에서 가운데 부분 원자 사이의 거리만 길게 만들어 볼록한 엠보싱 구조로 바꾼 것이다. 이 구조에서 볼록한 부분에 있는 탄소 원자들 사이의 거리는 평평한 부분에 비해 길어진다.

이후 연구진은 물질 고유의 성질을 알아내기 위한 분석법인 '라만분광법'을 활용해 엠보싱 그래핀을 관찰했다. 엠보싱 그래핀의 볼록한 부분을 국소적으로 가열하자, 열이 엠보싱 그래핀의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확산되는 그래핀 고유의 열전도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엠보싱 그래핀 형성 과정 모식도. (출처: IBS)
▲ 엠보싱 그래핀 형성 과정 모식도. (출처: IBS)

더 나아가 연구진은 엠보싱의 볼록한 부분에 레이저 빛을 조사할 경우 입사광과 반사광이 겹치면서 엠보싱 그래핀 중심점의 온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현상을 이용하면 엠보싱 그래핀의 국부적인 온도를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다.

연구진의 최종 목표는 엠보싱 안에 화학물질을 가둬놓고, 그 부분의 온도만 국부적으로 올려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초소형 반응기 제작이다. 이러한 초소형 반응기에서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화학반응이 진행되어 기존에 합성하지 못했던 신약과 같은 새로운 물질을 제조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엠보싱 그래핀 내부에서 정상파가 형성되며 온도가 국부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모식도. (출처: IBS)
▲ 엠보싱 그래핀 내부에서 정상파가 형성되며 온도가 국부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모식도. (출처: IBS)

그래핀의 주름은 매력 포인트

다시 말하지만 그래핀은 원자 두께의 2차원 구조다. 그런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군데군데 미세한 주름이 분포해 있다. 얇고 넓은 천을 바닥에 펴놓으면 자연스럽게 주름이 잡히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IBS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은 이 미세한 그래핀 주름의 너비를 조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정도면 그래핀 연금술사라고 하고 싶다.)

연구진은 '화학기상증착법'으로 그래핀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초고속 냉각을 하게 되면 주름의 너비가 5nm 이하인 그래핀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기존 수십nm 너비 주름보다 폭을 대폭 줄인 것이다.

이 연구가 왜 의미가 있을까. 기존 그래핀은 다른 물질과 접합하게 되면, 고유의 전기적 성질이 저하된다. 하지만 이 '나노주름 그래핀'은 전기적 성질이 거의 저하되지 않는다. 즉, 전자소자에 나노주름 그래핀을 이용한다면 일반적인 그래핀과 달리 전압의 손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핀 나노주름의 주사터널링현미경(STM) 이미지 및 실험 모식도. (출처: IBS)
▲ 그래핀 나노주름의 주사터널링현미경(STM) 이미지 및 실험 모식도. (출처: IBS)

과학자들의 그래핀 조각 맞추기 놀이

우리가 아는 고체물질들을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해 관찰하면 원자들의 배열이 보인다. 가령 이 원자들이 완벽하게 규칙적으로 배열됐다면 이를 단결정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단결정 여러 개가 모자이크처럼 붙어 있는 경우를 다결정이라 한다. 다결정 구조 안에는 원자들의 배치 방향이 뒤엉킨 경계면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액체 표면 위에 그래핀 조각을 띄운다고 생각해 보자. 탄소원자가 평면 육각구조인 그래핀 조각들의 개수가 많아지며 서로 뭉치게 된다면 어떤 다결정 구조가 형성될까? 딱딱한 바닥에서라면 그래핀 두 조각이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뭉칠 수도 있지만, 출렁이는 액체 위에서는 아마 불특정한 방향으로 배열될 것이다. 즉 바닥의 상태에 따라 그래핀의 배열이 결정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펑딩 IBS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 그룹리더 팀은 이런 상상을 실험으로 구현했다. 연구진은 액체 구리 표면 위에 그래핀 조각을 올리며, 두 개 이상의 그래핀 단결정 조각들이 서로 뭉치며 형성하는 구조를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그 결과 대부분 원자 배열 방향이 30도 틀어진 상태로 뭉친다는 것을 규명했다. 연구결과는 화학분야 권위지인 '앙게반테케미(Angewandte Chemie International Edition)' 4월호에 실렸다.

그래핀 조각들이 만나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모식도. (출처 : Angewandte Chemi International Edition)
▲ 그래핀 조각들이 만나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모식도.
(출처 : Angewandte Chemi International Edition)

연구진은 2~12개의 그래핀 조각이 뭉치면서 나타낼 수 있는 경우의 수 30개를 이론적으로 도출했고, 실제 실험에서는 그 중 27개를 찾아냈다. 즉, 그래핀 조각들을 아무데나 뿌려놓고 뭉치게 하면 서로 아무 방향으로나 붙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을 찾아가면서 매우 다양한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신소재 과학에서 원자들의 결정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학문적 주제다. 성능이 우수한 단결정의 형성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학자들이 이론적, 실험적으로 연구해왔다. 하지만 다결정 구조의 형성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이번 연구가 기초과학적인 이해도를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의미다.

물론 이런 연구에는 실용적인 이유로 산업계의 주목도 받는다. 그래핀 조각 여러 개가 만드는 '큰 그림'에 따라 다양한 물리적 특성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서도 작은 육각형 그래핀 수개가 무려 30개 가량의 다른 성질을 갖는 물질로 변신할 수 있음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래핀 조각 2~12개가 모여 형성할 수 있는 30가지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예측한 결과. (출처: Angewandte Chemie International Edition)
▲ 그래핀 조각 2~12개가 모여 형성할 수 있는 30가지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예측한 결과.
(출처: Angewandte Chemie International Edition)

그래핀은 탄생시점부터 '꿈의 신소재'라는 과찬을 받아왔다. 그래핀에 관련된 최근 연구 성과들을 차례로 살펴보니 그 별명이 과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핀을 접고, 주름을 만들고, 볼록하게 만들고, 조각을 모으는 식으로 그래핀은 무한 변신하며 새로운 물질이 된다. 또 어떤 그래핀이 세상에 등장해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뽐낼지 기대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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