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배에서 동료 연구자로 함께 뇌의 비밀을 어루만지다

글 박영경 기자

2018년 기초과학연구원(IBS)은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의 공동 단장으로 이창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신경교세포연구단장을 선임했다. 그간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을 이끌던 신희섭 단장은 사회성 뇌과학 그룹을, 이창준 단장은 인지 교세포과학 그룹을 각각 맡아 연구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기로 했다.

사실 두 사람은 신 단장이 2012년 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KIST에서 함께 연구했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이 단장을 한국으로 불러온 사람도 신 단장이었다. 선후배에서 동료 연구자가 된 두 과학자를 만났다.

신희섭&이창준

2003년 학회에서 운명 같은 첫 만남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섬에서 열린 ’2003 콜드 스프링 하버 미팅‘에서 신 단장은 신경계에서 PLC-β4 유전자가 생체리듬을 조절하는 과정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신 단장님은 뇌과학 분야에서 워낙 유명했습니다. 신 단장님의 발표를 듣고 교세포가 이 과정에 관여하지는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신 단장님에게 실험을 해보고 싶다고 요청했죠. 그러자 한국에 와서 2주간 실험을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이 단장은 17년 전 신 단장과의 첫 만남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에머리대 박사후연구원이었던 이 단장은 실험을 위해 신 단장이 이끌던 KIST 신경과학센터를 찾았고, 신 단장은 이 단장을 스카웃하기 위해 KIST 원장과 면담까지 잡았다. 이를 계기로 이 단장은 이듬해인 2004년 센터에 합류했다.

신 단장은 “이 단장은 신경계의 전기신호 데이터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등 당시 신경생리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며 이 단장 스카우트에 공을 들인 이유를 밝혔다.

이 단장이 KIST 신경과학센터에 합류한 뒤 신 단장은 유전학을 바탕으로 한 뇌과학 기초 연구에, 이 단장은 전기생리학을 바탕으로 한 행동 분석에 주력했다. 연구에서 시너지가 나기 시작했다.

신희섭&이창준

가령 저체온증을 신경학적 관점에서 연구했다. 신경전달 물질인 아세트콜린을 분해하는 효소인 아세트콜린에스터레이스(AChE)와 치매의 관계를 연구하던 두 사람은 같은 주제를 다룬 논문이 해외에서 먼저 발표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단장은 연구 방향을 바꿔 아세트콜린에스터레이스와 저체온증과의 관계를 조사해보자고 제안했다. 신 단장이 치매 연구를 위해 아세트콜린에스터레이스를 생성하지 못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생쥐에서 저체온증이 나타났다는 점을 포착한 것이다.

이 단장은 생쥐의 교감신경에서 니코틴 수용체의 전기신호를 분석했고, 그 결과 정상 생쥐에 비해 신호가 40% 감소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국제학술지 ’생리학 저널‘ 2007년 2월호에 발표했다. 이 단장은 “당시 연구를 접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뇌 밖으로 눈을 돌려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신 단장님이 묵묵히 기다려줬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2012년 신 단장이 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장에 선임되면서 각자의 길을 걸었지만 2018년 공동 단장으로 다시 만났다. 당시 이 단장은 IBS에 교세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신규 연구단 설립을 신청하고 심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 단장은 “연구단을 새로 만드는 일은 초기에 에너지가 매우 많이 드는 만큼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의 공동 연구단장을 맡아달라는 IBS의 제안은 연구자로서 매우 좋은 기회였다”며 “신 단장님이 공동 연구단장 운영을 흔쾌히 수락한 덕분에 신 단장님과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KIST부터 IBS까지 두 사람이 자석처럼 붙어 다닌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던 이 단장은 “신 단장님과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며 “뇌과학 분야의 대가 옆에서 같이 연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말했다.

국내 최초로 뇌과학에 유전학 도입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은 기억, 감정, 공감 등 인지 기능이 신경계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일어나는지 연구하고 있다. 신 단장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이 연구에 유전학을 도입했다. 그는 1997년 뇌에서 간질과 운동 마비를 일으키는 PLC-β1과 PLC-β4 유전자를 발견해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지금까지 특정 유전자를 조절한 모델 생물을 이용해 다양한 신경학적 기작을 밝혀냈다.

신희섭단장

이후 연구팀은 실험에 사용한 생쥐 18종의 유전체를 비교 분석한 결과, 다른 생쥐의 공포에 특히 강하게 공감한 그룹의 생쥐에게서만 Nrxn3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른 종류의 생쥐의 Nrxn3 유전자에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자 이들의 공포 공감 능력 역시 증가했다.

공감 능력의 차이를 결정하는 신경회로를 규명한 연구도 유전학을 적용한 대표적인 뇌과학 연구 중 하나다. 2018년 신 단장이 이끄는 연구팀은 생쥐 두 마리를 각각 이웃한 방에 넣고, 한쪽 생쥐에게만 전기 충격을 줬다. 이때 방을 투명한 벽으로 만들어 옆 방의 생쥐가 전기 충격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 생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찰자인 생쥐는 상대방 생쥐의 공포에 공감하여 행동이 얼어붙게 된다. 즉, 공감 공포 반응을 보인다.

연구팀은 유전적으로 서로 다른 18종의 생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한 종류의 생쥐 그룹이 이웃 생쥐의 공포에 대하여 특히 증가된 공감 공포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몸을 부르르 떠는 ‘프리징(freezing)’ 행동을 다른 쥐보다 더 강하게 보였다.

이후 연구팀은 실험에 사용한 생쥐 18종의 유전체를 비교 분석한 결과, 다른 생쥐의 공포에 특히 강하게 공감한 그룹의 생쥐에게서만 Nrxn3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른 종류의 생쥐의 Nrxn3 유전자에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자 이들의 공포 공감 능력 역시 증가했다.

연구팀은 Nrxn3 유전자의 구체적인 기작을 밝히기 위해 전두엽 전대상 피질 부위의 서로 다른 종류의 뉴런에서 Nrxn3을 제거한 뒤 생쥐의 공감 능력을 비교했다. 전대상 피질은 충동 조절과 감정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험 결과 억제성 SST 뉴런(신호 강약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뉴런)에서 Nrxn3 유전자를 제거한 경우 생쥐의 공감 능력이 크게 증가됐다.

현재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사회성 뇌과학 그룹은 공감능력의 뇌 기전 연구에서 세계적으로 앞서 있다. 연구팀은 Nrxn3 유전자 연구 당시 생쥐 머리에 빛을 쪼여 SST 뉴런을 억제하면 공포에 대한 공감 능력이 향상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단에서 올해 2월에는 빛으로 RNA의 이동을 조절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RNA는 DNA의 유전정보를 단백질로 전달하는 물질로, 단백질 합성을 빛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신 단장은 “뇌는 늘 학습하기 때문에 유전자에 선천적으로 코딩된 정보보다 후천적으로 뇌에 기록된 특성이 중요하다”며 “최근에는 광유전학 기술이 발전해 특정 단백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실시간으로 알아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신경세포에서 별세포까지 연구 분야 확장

인간의 뇌에는 약 1조 개의 세포가 있다. 이중 약 10%에 해당하는 1000억 개는 신경세포(뉴런), 나머지는 신경교세포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신경세포였다. 신 단장의 주요 연구 분야도 신경세포다.

이창준

이 단장의 주요 연구 분야는 교세포, 그중에서도 별세포의 역할을 심층적으로 연구한다. 별세포는 돌기들이 별처럼 사방으로 뻗은 세포로, 주로 신경세포의 기능을 돕는다고 알려져 있다.

2010년 이 단장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별세포가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가바(GABA)’를 분비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뉴런만 신경전달물질을 합성하고 분비한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연구였다. 이듬해 이 단장은 별세포가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를 내보낸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학계에서 별세포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신경전달 과정에서 별세포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신경세포만 신경전달에 관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신 단장은 “신경세포와 별세포 모두 뇌 기능에 관여하는 만큼 뇌를 움직이는 하드웨어”라며 “이 단장이 연구단에 합류하면서 신경세포부터 별세포까지 뇌의 신경학적 작동 과정을 더욱 세밀하게 밝혀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창준단장

현재 이 단장이 이끄는 인지 교세포과학 그룹은 별세포를 연구해 치매나 파킨슨병 같은 뇌 질환의 발병 기작을 파헤치고 있다. 올해 1월에는 별세포가 도파민 세포를 잠재우면 파킨슨병이 생길 수 있다는 연구를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발표했다.

파킨슨병은 근육 강직이나 몸동작이 느려지는 등 운동장애가 나타나는 신경퇴행성 질환으로 그간 파킨슨병은 도파민 신경세포가 사멸해 생긴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연구팀은 쥐에 파킨슨병을 유발시킨 뒤 별세포에서 가바의 분비를 억제했다. 그 결과 도파민 생성이 원활해지면서 쥐의 운동 기능이 향상됐다. 또한 광유전학 기술로 파킨슨병에 걸린 쥐의 도파민 신경세포를 자극하자 걸음 수가 증가하면서 증상이 호전됐다.

이 단장은 “파킨슨병 초기에는 도파민 신경세포의 생성 기능이 중단됐을 뿐 아직 사멸하지 않은 상태”라며 “도파민 신경세포를 잠재우는 가바를 조절하면 파킨슨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단장은 뇌졸중 회복 과정에 별세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찾아내 논문 투고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별세포가 가바를 과도하게 분비하는 반응성 별세포로 변하면 뇌세포의 기능 회복도 억제된다”고 밝혔다.

연구단의 미래를 맡기다

신 단장은 올해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는 기초과학 연구에서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 단장의 협업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 단장은 국내에서 뛰어난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를 많이 진행했다”며 “다양한 연구자들과 거리낌 없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배울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 단장은 최근 곰팡이 분야 대가인 이향범 전남대 농식품생명화학부 교수와 공동으로 치매 등 난치병 치료제의 후보물질을 찾고 있다. 이 단장은 “푸른곰팡이에서 세계 역사를 바꾼 치료제 페니실린을 얻은 것처럼 치매 치료제도 곰팡이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에서 시작했다”며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협업하는 건 늘 즐겁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인터뷰 중 잠깐 쉬는 시간에도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실험 결과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천상 연구자였다. 선후배로, 동료 연구자로 두 사람이 이토록 오래 인연을 이어온 비결이 뭘까.

신 단장은 “연구자가 궁금한 게 생기면 머뭇거리지 않고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자율성이 생명처럼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연구 철학”이라며 “이 단장과는 이런 점에서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단장이 은퇴한다는 이유로 연구단이 해체되는 건 막대한 손해인 만큼 이 단장이 뒤를 이어 연구단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것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