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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감행하는 이별, 낙화(落花)와 낙엽(落葉)

“점점 빨리 떨어지고 있어. 사흘 전에는 그래도 백 개나 달려 있었는데.
세고 있으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많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간단해. 봐, 또 하나. 이제 다섯 개밖에 안 남았어.”
“다섯이라니, 도대체 뭐가? 뭔지 말을 해봐.”
“잎새... 담쟁이덩굴의 저 잎새 말이야.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나도 가야겠지.”



미국 작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김성 옮김)는 아마도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위 장면은 폐렴으로 회복 가능성이 희박해진 존시와 룸메이트인 수의 대화다. 수는 아래층의 화가 버먼에게 이 얘기를 전한다. 버먼은 나이 60이 넘도록 이렇다 할 작품을 그리지 못한 실패한 화가다.

다음 날 아침 수는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젖혔고 두 사람은 지난밤 비바람을 견디고 꿋꿋이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를 발견한다. 그다음 날에도 잎은 여전히 붙어있었고 존시는 기운을 차린다. 그사이 아래층 버먼이 폐렴에 걸려 이틀 만에 사망한다. 다음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존시, 창밖을 좀 봐. 저 벽에 붙어있는 담쟁이덩굴의 마지막 잎새. 바람이 불어도 조금도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아? 아! 존시, 저것이 바로 버먼 할아버지의 걸작이야... 그분이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날 밤, 저것을 그려놓으신 거야.”

일주일 만에 나목(裸木)으로

소설 속 존시(사실은 오 헨리)의 관찰처럼 봄에서 가을까지 몇 달을 꿋꿋하게 가지에 붙어있던 잎들이 늦가을이 되면 불과 며칠 사이에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얼핏 생각하면 바람이 세게 불어 떨어진 것 같지만 매년 그 무렵만 바람이 강할 리는 없다.

과학교양서적 가운데 올해 상반기 가장 주목을 받은 노르웨이 오슬로대 호프 자런 교수의 ‘랩걸’을 보면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잎을 떨어뜨리는 과정이 잘 묘사돼 있다.

“땅에 떨어진 낙엽들을 모아 관찰하면 그것들 하나하나는 모두 밑동 부분에서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게 잘린 것을 볼 수 있다. 이파리를 떨어뜨리는 것은 고도의 연출이 필요한 작업이다. 먼저 엽록소가 잎맥과 가지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좁은 세포다발 뒤쪽으로 이동을 한다. 그러다가 우리가 모르는 신비스러운 이유에 따라 정해진 날이 되면 이 세포다발들에서 물이 빠지면서 약하고 바삭바삭해진다. 이제 이파리는 자신의 무게만으로도 꺾여서 가지에서 떨어질 정도가 된다. 나무 한 그루가 1년 내낸 쌓아온 공든 탑을 모두 무너뜨리고 버리는 데에는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잎뿐이 아니다. 활짝 핀 꽃도 시간이 되면 시들어 떨어지고 열매도 때가 되면 떨어진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식물이 의도한 결과로, 탈리(abscission)현상이라고 부른다. 꽃이나 잎, 열매를 만드는 과정이라면 모를까 이런 것들이 떨어지는 과정까지 정교한 조절의 결과라는 게 의아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제대로 버리는 것도 식물의 생존에 중요하다.

얼핏 생각하면 늦가을에 잎을 버리고 이듬해 봄에 새로 만드는 게 낭비 같지만(겨울 햇살이 약해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 겨울을 견뎌내는 데에는 꼭 필요한 일이다. 활엽수의 경우 잎의 표면적이 넓어 겨울에 잎이 얼지 않게 유지하기도 어렵고 잎 위로 눈이 쌓이면 자칫 나뭇가지가 부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잎이 붙어있는 침엽수에서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

또한 잎을 버리는 일은 식물의 건강에도 중요하다. 잎이나 꽃잎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단면이 단단하고 매끄럽게 변하지 않으면 외부 병원균의 감염이 일어날 수 있다.
즉 잎이나 꽃잎이 떨어지기 전에 식물 본체와 물질 이동이 끊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분리가 되는 경계면, 즉 탈리영역(abscission zone)에서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식물학자들이 탈리를 연구했고 이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 네트워크도 상당히 규명됐다. 그럼에도 탈리영역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변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떨어져 나가는 쪽에 리그닌 형성돼

그런데 최근 국내 연구자들이 쌍떡잎식물의 모델인 애기장대를 대상으로 꽃잎의 탈리 과정을 상세히 규명해 화제다. 곽준명 DGIST 교수(전(前) IBS 식물 노화・수명 연구단 그룹리더)와 이유리 IBS 식물 노화・수명 연구단 연구위원 연구팀은 이 과정에서 기존 학설의 오류를 바로잡았고 식물세포분화에 대한 놀라운 사실도 발견했다.

1년생 십자화과 식물인 애기장대는 밥풀보다도 작은 흰 꽃잎 네 장이 십자(十字) 모양으로 핀다. 길을 가다 보면 애기장대와 사촌인 풀을 흔히 볼 수 있다. 참고로 노란꽃이 피는 유채도 십자화과 식물로, 유채꽃의 축소판이라고 보면 된다.



▲ 1년생 십자화과 식물인 애기장대에는 꽃잎이 네 장인 조그마한 흰 꽃이 핀다. 최근 국내 연구진이 애기장대 꽃의 탈리를 규명해 화제다.
(제공 위키피디아)

아무튼 애기장대 꽃이 아무리 작아도 꽃은 꽃이므로 수분(受粉)이 된 뒤에는 떨어져야 한다. 괜히 매달려 있다가 찢어질 경우 상처 난 부위에 감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골격이 없기 때문에 세포 자체가 벽돌처럼 쌓여 형태를 유지한다. 즉 모든 세포는 셀룰로오스로 이뤄진 세포벽을 외골격으로 지닌 셈이다.
그리고 벽돌과 벽돌 사이에 모르타르(시멘트와 모래 반죽)를 발라 고정하듯이 식물 세포벽 사이에도 중간박막층(middle lamella)이 존재해 서로를 안정적으로 연결한다.

따라서 꽃잎의 탈리가 일어나려면 꽃잎과 식물 본체의 경계면에 있는 세포벽 사이의 중간박막층을 끊어줘야 한다. 벽돌벽을 이런 식으로 나눈다면 모르타르를 정으로 쪼아 조금씩 부숴야겠지만 식물의 경우는 분해효소를 분비해 중간박막층 분자들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 그리고 동시에 잎이 떨어지고 외부에 노출될 식물 본체 쪽 잔존세포도 보강해야 한다.

과거 연구자들은 리그닌이 잔존세포의 표면을 덮어 감염에서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리그닌(lignin)은 식물의 목질부를 구성하는 고분자로 식물의 세포벽을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리그닌은 목재에서 셀룰로오스 다음으로 많은 중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IBS 연구자들이 자세히 들여다본 결과 식물의 본체 쪽이 아닌, 꽃잎의 떨어지는 단면 쪽에 리그닌 층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식물은 어차피 떨어져 나갈 꽃잎을 보호하겠다고 리그닌 층을 만드는 낭비를 할까.


▲ 식물은 골격이 없기 때문에 세포 자체가 벽돌처럼 쌓여 형태를 유지한다. 세포 사이에서 모르타르 역할을 하는 중간박막층(middle lamella. 빨간색)을 분해해 없애야 탈리가 일어날 수 있다.
(제공 BERIS)

이런 의문은 리그닌의 구조가 밝혀지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리그닌은 꽃잎이 떨어져 나가는 단면에 세포 두세 개 층 두께로 벌집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일종의 울타리처럼 작용해 꽃잎을 식물의 본체로부터 정확한 위치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탈리의 경계에서 이웃하는 세포 사이를 분리시키는 세포벽(중간박막층) 분해효소가 꽃잎이 탈리되는 경계선 위치에만 밀집되게 하고 주변 세포들로 퍼지지 않게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 리그닌 벌집구조가 이탈세포층에서만 형성됨을 보여주는 현미경 사진이다. 가운데 꽃(개화 후)의 꽃받침과 꽃, 수술대 쪽에 리그닌 벌집구조가 보인다. 아래는 확대 이미지다.
(제공 DGIST & IBS)


▲ 세포벽 분해효소(pectinase)의 분포(빨간색)를 보여주는 현미경 이미지로 정상식물(위 왼쪽)은 탈리영역에 몰려 있는 반면 리그닌 구조를 만들지 못하는 돌연변이체(위 오른쪽)는 넓게 퍼져 있다. 그 결과 정상식물에 비해 탈리단면이 매끄럽지 못하다(가운데 및 아래).
(제공 DGIST & IBS)

리그닌에 의한 이러한 정확한 탈리 현상은 꽃잎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식물 본체 쪽의 잔존세포들을 보호한다. 꽃잎 세포가 리그닌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게 처리하자 정말 효소들이 경계 너머로 퍼져 탈리가 부정확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잔존세포의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고 여기에 이탈 세포들이 들러붙으면서 보호막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식물체는 외부 세균의 침입에 취약해졌다. 그런데 리그닌이 잔존세포의 표면을 덮어 보호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물질이 그 역할을 하는 걸까.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발견

연구결과 잔존세포 보호막은 큐티클층인 것으로 밝혀졌다. 큐티클(cuticle)은 생물체의 가장 바깥쪽 세포표면을 덮는 층상구조물로 각피(角皮)라고도 부른다. 식물의 경우 큐틴(cutin)이라는 지방산 고분자가 주성분으로, 수분의 증발을 막고 식물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탈리가 일어난 뒤 식물 본체 쪽 잔여세포가 큐티클로 덮이는 건 당연해 보이는 데 그동안 식물학자들은 왜 리그닌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는 게 병’이라고 여기에는 식물발생학의 지식이라는 걸림돌이 있었다. 즉 식물배아의 발생 과정에서 세포의 성격이 규정된 뒤에는 바뀌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과학 상식이었다. 따라서 탈리로 내부 세포가 외부로 노출되더라도 이들 세포가 표피세포로 바뀔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내부 세포인 잔존세포 표면에 표피세포에서만 형성 가능한 큐티클 층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로 식물은 동물과 달리 세포가 고정돼 있으므로 멀리 있는 표피세포가 탈리가 일어난 면으로 이동해 와 자리할 수도 없다.



▲ 애기장대 꽃잎 탈리 과정을 도식화한 그림이다. 이탈세포에 리그닌 벌집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과 잔존세포에 큐티클층이 형성되면서 탈리가 일어난다.
(제공 DGIST & IBS)

이번에 잔존세포 표면에 큐티클층이 형성돼 식물체를 보호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배아발생 과정에서 세포의 성격이 정해진 뒤 바뀌지 않는다는 식물발생의 도그마가 무너졌다. 떨어져 나가는 꽃잎 세포 쪽에 리그닌 벌집구조가 만들어진다는 발견도 중요하지만, 잔존 세포가 표피 세포로 분화한 이번 연구결과와 같이 성체 식물 세포도 필요에 따라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발견이 좀 더 근본적인 발견일 수 있겠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한편 이번 발견은 농업 분야에도 응용될 전망이다. 즉 작물의 탈리를 조절하면 수확량을 늘리거나 농사일을 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추는 열매가 잘 안 떨어져 수확이 어려운데 탈리를 촉진한다면 농사짓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매년 가을이면 태풍 걱정을 해야 하는 과일의 경우는 탈리를 억제할 수 있다면 낙과를 줄여 수확량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 재배 벼의 대다수는 낟알의 탈리, 즉 탈립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게 된 돌연변이체다. 이삭을 한 번 쭉 훑으면 탈립성이 작은 품종인 니폰베어는 낟알이 그대로 붙어있는 반면(왼쪽) 탈립성이 큰 품종인 카살라스는 쉽게 떨어진다(오른쪽).
(제공 ‘사이언스’)

사실 인류는 이미 탈리 현상을 농작물 선별의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해 성공한 경험이 있다. 오늘날 동남아와 인도에 자생하는 야생 벼는 벼가 익으면 어느 시점에서 낟알이 떨어져 흩어진다. 즉 탈립성이 크다. 반면 우리가 익숙한 재배 벼는 낟알이 계속 붙어있는 돌연변이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나온 이유다(붙어있는 낟알이 무거워지므로). 따라서 인류가 재배하는 벼는 야생 벼에서 나타난 돌연변이체가 선별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런 돌연변이체는 얼마 못 가 사라졌을 것이다. 낟알이 다 성숙했는데도 떨어지지 않으니 자손을 제대로 퍼뜨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물이 되면서 사람이라는 동물이 알아서 수확해 이듬해 씨를 퍼뜨리니(모내기) 걱정이 없다. 물론 인류 역시 낟알이 붙어있어 수확이 훨씬 쉽고 양도 많기 때문에 이 돌연변이체를 재배한 것이지만.

지난 2006년 미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야생 벼와 재배 벼의 게놈을 비교해 낟알의 탈립성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즉 SH4와 qSH1이라는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낟알의 탈립성을 크게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유전자들은 탈리영역에서 집중적으로 발현해 탈리 과정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매년 봄이 되면 매화를 시작으로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라일락, 장미로 꽃의 향연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꽃에 매료되는 건 꽃이 아름다워서이기도 하지만 며칠 못 가 떨어지는 덧없음 때문 아닐까. 봄꽃의 클라이맥스인 벚꽃이 특히 더 그런데 필자의 경우 꽃이 만발했을 때보다 꽃잎이 흩날릴 때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년 봄 벚꽃의 꽃비를 감상할 기회가 된다면 이번 애기장대 꽃잎 탈리 연구가 떠오를 것 같다.

본 콘텐츠는 IBS 공식 블로그에 게재되며, blog.naver.com/ibs_official/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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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11-28 14:20